반도체 업계와 ‘제2차 도자기 전쟁’
[日 임진왜란 첫 칙령 ‘도공 납치’ / 무력으로 조선 백자기술 약탈 / 21세기 韓 반도체 상황 비슷해 / 中 인력 유출 더이상 방관 안돼]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일이 많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일본 백자의 고향, 사가현 아리타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눈 덮인 산자락을 보며 굽이굽이 달려 사가현 아리타 마을에 도착했다. 도자기 갤러리들이 늘어서 있는 1㎞ 남짓 거리가 전부인 작은 시골마을이다. 일본 백자의 고향 ‘아리타’를 태동시키고, 일본 백자시대를 연 이는 조선의 도공(陶工) 이삼평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후 그는 백자 생산에 적합한 점토 광산을 찾아내고, 일본땅에 가마를 건다. 이때부터 17세기 유럽을 주름잡는 일본의 백자시대가 열린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른다. 조선침공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첫 칙령이 조선 도공의 납치다. 왜군이 본국에 보낸 첫 전리품이 김해 인근 향교에서 제기로 사용하던 사발이었다. 그가 조선의 백자를 얼마나 탐냈는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은 결과적으로는 무력을 통해 조선의 최첨단 도자기 제조기술과 인재를 빼앗아 간 인재확보 전쟁, 기술확보전쟁이다. 일본은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도공을 납치해 일본 백자가 전 세계를 제패하는 기술력을 얻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반도체의 상황은 기술·경제·사회 등 다양한 측면에서 16세기 조선 도자기의 그것과 일치한다. 도자기와 반도체는 둘 다 흙으로 만든다. 도자기는 점토에서, 반도체는 모래에서 시작한다. 도자기에는 도기와 자기가 있다. 섭씨 1300도 고온의 가마에서 구워낸 그릇을 자기라 한다. 자기는 도기에 비해 훨씬 가볍고 충격에 강하다. 자기 제작의 핵심은 흙과 불을 다루는 기술이다. 태토(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찰기가 있는 흙)와 유약이 불순물 없이 정제되고 균일하게 분포되는 것이 필수다. 가마불이 너무 세면 그릇이 녹아내린다. 가마에 갑자기 찬 공기가 흘러들어가면 그릇이 그 자리에서 터진다. 장마철의 미세한 습기,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가마 내부를 틀어버린다. 그릇 15개를 넣어서 마음에 드는 것 5개를 건지면 대성공이다. 조선의 도공은 가마를 신(神)처럼 모시고 가마의 온도, 기압 등을 유지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반도체 제조과정이 이와 매우 흡사하다. 세라믹 파우더를 고순도로 정제한다. 원재료가 균일한 비율로 혼합돼야 한다. 이를 구워 웨이퍼를 만든다.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고 조각조각 잘라내면 각 조각이 반도체 칩이 된다. 텍사스 사막의 반도체 공장과 브라질 열대우림 근처에 반도체 공장이 완벽하게 동일한 조건에서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어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1000년 전 도공들이 가마를 다루던 정성과 반도체 회사의 박사급 엔지니어들이 공정의 온도·기압 등 각종 인자를 튜닝하는 노력은 공학적 정교함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도자기 제조기술이 없던 17세기 유럽에서 접시 한 점이 집 한 채 값이었다. 조선땅에서 평민이 막걸리를 먹던 백자 사발은 유럽에서는 왕족이나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침공을 통해 400여명의 도공을 데려간 일본이 중국 일색이었던 유럽 도자기 시장에 진출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한 세기 동안 일본이 유럽에 판매한 도자기가 무려 7000만점이다.
반도체의 맹주 대한민국이건만 분야의 전망이 밝지 않아 걱정이다. 반도체 수요 감소로 인한 업황 하락이 예견된다. 지난주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향후 6년간 2000억달러어치의 반도체 수입이라는 당근을 제시했다. 국내기업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인력 유출이다. 중국기업은 엄청난 연봉을 제시하며 국내 반도체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해간다. 이들이 중국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일궈낼 것이다. 조선의 도공이 일본 도자기산업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조선의 일개 도공 이삼평은 일본에서 토지, 광산채굴권, 150여명의 도공을 하사받고, 일본에서 도조(도자기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500여년 전, 아리타 마을 자신의 가마에 장작개비를 던져넣으며 이삼평은 고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나라는 지금 ‘제2차 도자기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원유집 한양대 교수·컴퓨터학